소목의 역사
고대에는 목수를 재인(梓人)·재장(梓匠)·윤여(輪輿)라 했는데, 이는 수레에서 생긴 중국식 명칭이다. 신라에서는 재장이 속해 있는 관서를 마전(磨典)이라 했고, 대목에 해당하는 목척(木尺)은 별도의 전읍서(典邑署)에 속하였다. 소목장이라는 명칭은 고려 때부터 나타나며 조각장·나전장과 더불어 중상서(中尙署)에 예속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의 ≪경국대전≫에서는 일괄하여 목장(木匠)이라 하였는데, 그 대신 세분화한 수레장[車匠]·선장(船匠)·통장(桶匠)·표통장(表筒匠)·마조장(磨造匠)·풍물장(風物匠)·안자장(鞍子匠)·목소장(木梳匠)·목영장(木櫻匠)을 따로 두었음이 경공장의 전문 직종으로 명시되어 있다.
목장 중 소목에 대해서는 ≪고려사≫에 나오고 조선 초 세조 때의 기록에도 보이므로 대목과는 구분하였던 것 같다. 소목장의 기능은 목가구의 제작과 건축상의 소목 일을 포괄하고 있다. 조선 초기까지는 목가구가 주로 왕실과 상류계층을 위해서 제작되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민간에 널리 보급되고 종류도 주위의 생활환경에 따라 다양해져서 지역적인 특성이 현저히 나타나게 되었다.
더구나 지방에서는 목수를 불러서 필요한 기물을 제작하는 자급자족 형태였고, 지금처럼 기계화로 인한 대량 생산이 불가능한 수작업 형태의 제작이기 때문에 우리 나라의 목가구는 일정한 규격품을 찾아보기 어렵다.
조선시대에 왕실이나 상류계층의 가구는 옻칠과 밀다회(密陀繪)·자개·대모 등 좋은 치레방법이 구사되었고, 십장생·운학·용문·시·만자·아자 등을 정교하게 조각하여 장식성이 강조되고 귀족적인 품위를 나타낸 것도 있지만 서민사회는 제약이 많았다. 특히 검소함을 중요시 하는 유교 문화로 인해 선비들이 사랑방의 주류인 문방구의 과다한 겉치레를 기피하는 풍조로 말미암아 나무 자체의 재질을 살리려는 생각이 뚜렷하게 격조를 이루어내어 유교적 덕목에 걸맞게 화려하고 복잡한 것보다 단순하고 안정된 분위기에 적합하도록 수평과 수직이 강조된 장방형의 형태와 단순한 구조, 쾌적한 비례, 간결한 선과 면을 지닌 목가구가 제작되었다.
남도(南道)가구가 문목(紋木)을 귀하게 여기는 점이라든지, 문목판의 가장자리에다 회장(回裝)기법으로 뇌문(雷文)을 돌리는 섬세한 솜씨도 모두 그에 연유한다.
전수관(전수생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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